옛날 호러란 늘 무섭지 않게 되고 마는 것인가
아임 드리밍의 에피소드를 준비하느라 슬래셔 영화를 보고 있다. 그중에서도 슬래셔의 조상급인 1974년의 “텍사스 전기톱 학살”을 봤다.
그러나... 아, 그러나 그것은 무섭지 않았다.
물론, 무섭지 않다고 해서 별로였다는 건 아니다.
시작부터 즐거웠다. (공포 영화에 즐겁다는 표현을 쓰는 게 이상할 수도 있겠다만.) 그 클래식한 자글자글한 필름 느낌부터가 피부 한 겹 아래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주 투박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게 공포물을 소비하는 큰 이유 중 하나라 생각한다. 투박하다고 해서 가치 없는 건 아니란 말이지. 세련된 척하면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죽이는 것들보다는 낫단 말이다.
또한 영화 도입부에서 징그러운 소리가 점점 커지며,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묻히는 것은 암시적이다. 폭력은 그저 배경음이 되며, 공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멀쩡하게 살아간다. 극중의 캐릭터들로 대변되는 ‘우리’ 말이다. 따라서 관객인 ‘우리’는 (캐릭터들처럼) 공포를 잊는 동시에, 그것을 잊지 않으며 (공포물을 보러 왔으니), 한 겹 떨어진 상태에서 공포를 소비할 수 있다.
게다가, 공포 요소라고 오피셜하게 등장하는 것들이나, 일반 삶의 범주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나, 그다지 아름답진 않다는 점이 의미심장했다. 이를테면, 장애가 있는 캐릭터가 소변 한번 평화롭게 누지 못하는 장면. 그 인물을 다른 캐릭터들이 버려두고 이리저리로 자유로이 가버린다는 점. 또한, 이 영화 전체를 짓누르는 더위, 그 자체. 거기다 소 도축 장면.
그런데 여기서부터 무섭지가 않았다.
이런 아름답지 않은 삶의 장면들을 누가 지켜보는 것 자체가 나는 무섭다기 보다는 위안이 된다. 이 또한 공포물을 소비하는 이유 중 하나라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이렇게 느끼는 다른 이들이 있기에 공포가 장르가 될 정도인 게 아니냐는 말이다. 거부감만 들어서야 전 세계적으로 공포물이 인기가 있을 리가 없다.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나를 누가 버려두고 간다든지. 누가 칼로 위협한다든지. 이런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보다, 그걸 인정하는 게 더 위안이 된단 소리다. 누군가가 이런 상황들을 목격함으로써 이것들은 현실이 된다. 나만의 착각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공포를 좋아한다.
그런데 “텍사스 전기톱 학살”은 무섭지 않은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아아 그것은 개그가 되고 말았다.
좀 이상한 사람을 만나도 이상하다는 말도 하지 않는 캐릭터들이 등장할 정도로 이상한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히피라 그런지, 누군가가 자해에도 놀라지 않는데, 그 놀라지 않는 게 나는 무섭다기보다는 웃겼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갑자기 이 자해자가 주인공 그룹의 사진을 찍지 않나... 그러고서 돈 달라고 하고... 돈 안 준대니까 차에서 사진을 태우고... 다른 캐릭터를 칼로 공격하고...
그제서야 히피들은 패닉한다! 그들의 패닉이 이렇게 뒤늦었다는 게 자해자보다 무서웠다면 무서웠던 지점이었다. 뭐랄까, 뭐가 무서운 건지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텍사스 전기톱 학살을 벌이는 사람들은 약간은 개념이 있다. 뭐냐 하면, 이 여행자 캐릭터들이 그냥 갈 길을 갔더라면 이들은 죽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전형적인 공포 영화답게, 이 캐릭터들은 ‘잘못’을 하고, ‘응징’을 받는다. 그 잘못이라 함은, 남의 사유 재산에 멋대로 들어간 것이다. ㅠㅠ
솔직히 웬 이상한 히피들이 껄렁껄렁 우리 집에 들어온다면, 전기톱 학살자처럼 대뜸 죽이지야 않겠지만... 그 전기톱 학살자의 정신이 약간 이상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가 이들을 죽인 게 그리 이상하진 않다. 가뜩이나 정신이 나간 자가 침입자를 발견하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하는 게, 딱히 공포스럽진 않단 얘기다.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자들은 남의 집에 무턱대고 들어왔단 말인가? 내 집에 침입자가 들어와서 공격하는 것도 무작정 타인에게 공포가 될 일인가? 난 내 집에 누가 들어왔다는 게 더 무서운데.
스토킹 같은 게 처벌을 안 받음이 최근에 너무나 극명하게 조명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웬놈이 내 집 초인종을 마구 누르고 간다든지. 내 집앞을 서성거린다든지. 심지어 내 집에 들어와도. 그자를 내가 어찌할 수 없다고? 이런 미친!!! 그게 공포다. 내 집에 들어온 침입자를 내가 없앨 수가 없다는 게. 그자의 ‘살 권리’라는 것 때문에.
말도 안 된다. 나는 전기톱 학살자가 좀 불쌍했다. 이자는 자기와 비슷한 방향으로 정신이 나갔으나, 그 정도가 좀 덜해 일반 사회에서 일반인인 척 살 수 있는 자에게 정신적 조종을 받고 있는 듯했다. 즉, 덜 미친놈이 더 미친놈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덜 미친놈은 직접 전기톱을 쓰지 않았으며, 더 미친놈에게 쓰라 했다. 더 미친놈은 말도 못 하기에, 시키는 대로 했고, 어쩌면 집에 들어오는 자는 다 죽여버리라고 명령을 받았던 것 같다. 그 명령을 어길 시에는 학대당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왜 남의 집에 들어가느냐, 이 말이다.
극 중 물리적 배경은 텍사스다. 심지어 죽임당하는 캐릭터 중 몇은 텍사스 출신인데, 얘들아, 왜 때문에 너네 동네에서 남의 사유 재산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는 거니... 대체 왜 그러는 거니... 죽고 싶은 거니...
아무튼, 역시, 많은 공포 영화가 그렇듯, “텍사스 전기톱 학살” 역시 학대에 대한 내용이었다. 다만, 슬래셔 영화는 그 학대의 결이 좀 단순해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슬래셔에서 느껴야 하는 감정은 다른 공포물에 비해 비교적 분명하다), 전기톱 학살자가 너무 불쌍해서 슬래셔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옛날 영화라서 고어 효과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게다가 한아임은 원래도 오컬트를 좋아하지.
그래, 오컬트. 약간 오컬트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어서 신선했다. 그러나 역시 무섭진 않았다.
불쌍한 전기톱 살인마...
교훈: 남의 집에 들어가지 마라. 세상에 아무리 개판 판사들이 ‘심신 미약’ 따위를 적용하며 범죄자들이 남의 집을 들락날락하게 해 줘도, 언제 “미친” 집 주인이 전기톱 살인마처럼 당신을 찢어발길지 모른다.
전기톱을 장만해야 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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