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해서 유용한 픽션 찬미
옛날에 할란 앨리슨이 어느 에세이에서 ‘요즘 세대는 TV에 나오는 게 전부 진짜인 줄 안다’며 한탄하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픽션을 픽션으로서 읽을 줄 모르고 (그는 특히나 ‘상상하며 읽기’와 ‘눈에 보이는 대로 시청하기’의 차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TV에 나오는 게 전부 진짜인 줄 알고, 그 ‘진짜’인 것을 좇기 위하여 ‘정말로 진짜인’ 자신의 삶은 내던지고 있다는, 대충 뭐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다. 할란 할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따라서 할아버지가 목격한 현상은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일 텐데.
<‘요즘 세대’의 정의>
단, 할란 할아버지가 목격했던 현상과 내가 목격하고 있는 현상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내가 말하는 ‘요즘 세대’는 절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세대가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다양한 나이대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 수명이 길어져서 그런 것 같다. 요즘에는 어리지 않다고 해서 마냥 ‘요즘 것’에 적응하진 않았다간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도태된다. 그냥 노년이 괴롭다. 그런데 심지어 그 노년이 한 30년은 가는 것 같다. 그러니 예전만큼 세대를 나이에 따라 나눌 수가 없다. 학교를 졸업하면 일하다가 은퇴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두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안정되게 사망할 수 있던 시대는 이제 저물었다.
<실용주의와 ‘진짜’ 찾기>
아무튼, 요즘에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요즘 세대’라고 부르는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면 진짜인 줄 아는 경향성이 있다.
특히나, ‘눈에 보이더라도 어차피 상상의 산물인 픽션은 그저 킬링 타임용’이며, ‘현실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픽션에서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내지 못한다.
이것 자체는 별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짜 문제는 이거다. 논픽션을 보면서 그게 정말로다가 레알 참트루 wirklich 진짜인 줄 안다는 것. 그래서 그게 ‘인생에 도움이 될 줄 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곳곳에 넘쳐나는 시대이니까, 픽션을 소화하는 훈련을 아예 하지 않고 ‘진짜’를 찾는다는 것.
뉴스에 나오면 퓨어 픽션과 달리 진짜인 줄 알고, 유튜브에 나오면 퓨어 픽션과 달리 진짜인 줄 안다. 심지어 인플루언서가 진짜인 줄 안다. 뉴스,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진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렇다 한다. 픽션에 나오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진짜라 한다.
카메라 앞에서 웃다가도 집에 가서 우울증 약을 집어삼킨다는 상상을 안 하거나 못 한다.
뉴스에 등장하는 컷 너머에도 세상이 펼쳐져 있으며, 바로 1cm만 카메라를 돌렸어도 다른 스토리텔링이 나올 수 있었다는 걸 상상을 안 하거나 못 한다.
유튜브도 그렇고, 모든 논픽션이 다 그렇다는 걸—진짜로 존재하긴 하는데 그 존재하는 매 순간순간이 새로운 스토리텔링인 존재들이 얼마나 변형 가능한 찰흙덩이들인지를—상상을 안 하거나 못 한다.
<어린 사람들의 자살>
나는 어린 사람들이 (여기선 물리적 나이를 말함) 인플루언서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성공, 자유로움의 이미지를 보고 자신의 환경을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하는 이유가 모든 논픽션조차 픽션임을 아는 훈련을 아예 건너뛰는 데에 있다고 본다.
더 나이 든 세대들은 아날로그만 존재하던 시대를 기억하는데 (따라서 도저히 편집을 거칠 수 없는 지루하고 기나긴 시간과 거대한 공간들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데), 어린 세대들은 그러한 존재 방식 자체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거다.
거기다 ‘논픽션은 진짜’라는 픽션이 마치 과학 법칙인 것처럼 유행하니, 인플루언서든 뉴스든 사설이든, 그것들이 전부 픽션임을 모른다.
<픽션과 논픽션의 정의>
논픽션은 그 근원으로 가면 거의 다 픽션이다. 정말 무슨 ‘지구에는 중력이 존재한다’ 정도의 진리 같은 게 아니라면, 다 의견이고 이론이고 변하는 무언가이다.
그 외에 사실 요소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을 ‘논픽션’이라고 부르진 않지 않나? 보통 그냥 ‘수치’라고 부르지 않나? 예를 들면:
- 특정 지방의 특정 시간의 온도
- 출퇴근 시간
- 어느 한 가구의 인원수
이런 것들은 변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논픽션이라고 부르진 않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런 것들을 갖고 변형 가능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논픽션이지.
온도를 나열한 걸 갖고 논픽션이라고 하진 않는다. 출퇴근 시간 목록을 논픽션이라고 하진 않는다. 정부에서 가구당 평균 인원수에 대해 뭔가 데이터베이스를 만든다면, 말 그대로 ‘데이터베이스’라고 부르거나 ‘보고서’라고 부르지, 그걸 논픽션이라고 부르느냔 말이지.
만약 그런 것들을 논픽션이라고 부른다면, 거기서 혼돈이 오는 걸 수도 있겠다.
수치나 중력 같은 불변의 무언가 vs. 그것들을 갖고 엮어내는 이야기를 지칭하는 데에 같은 용어를 쓰니까, 둘 다 전부 뭉뚱그려서 논픽션이라고 부르며, 수치와 중력과 마찬가지로 ‘그것으로 엮어낸 이야기’도 전부 ‘진짜’이며 ‘불변’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변하는 이야기, 논픽션>
그런데 아니다.
수치나 중력은 이 지구에서는 불변이지만, 그걸로 인간은 수많은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어 뉴스는 무엇을 뉴스거리로 삼을 것인지부터 시작한다. ‘이 얘기는 중요하니까 해야 한다’부터가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픽션이다. 당최 누가 절대 진리로서 ‘이것은 중요하니 뉴스에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그자는 신인가? 아닐 텐데. 그냥 그 사람 의견이다.
모든 뉴스는 관점이다. 옛날에 언젠가 뉴스가 중립적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모르겠는데, 지금은 확실히 아니다. 언론사, 방송국들은 정치·경제적 관점으로 갈린다.
그런데 뉴스가 논픽션이라서 ‘진짜’라고 믿으면 어떻게 되나?
뉴스에 등장하는 게 그 자체로 중요한 줄 알게 된다. 없앨 수 없는 것인 줄 알게 된다. 그것이 없는 현재나 과거나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
과거나 현재야 그렇다 치더라도, 뉴스를 보고 거기 나오는 게 전부 다 진짜인 줄 아는 습관이 들면, 미래를 상상할 줄 알아야 그 미래가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걸 모른다.
마치 ‘옛날 사람들’이 당시의 드라마를 보면서 그게 ‘진짜’인 줄 알고는 거기 나오는 선역들을 좋아하고 악역들을 미워했다고 전해 내려오는 것과 흡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다. ‘요즘 세대’는 유튜버가 친한 척을 하면 진짜 자기 친구인 줄 안다. Parasocial relationship에 대한 이론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는데, 그 등장하는 장소가 또 유튜브다. (The irony!) 그러면 사람들은 그걸 보고 또 그것이 진짜라 한다.
논픽션이 전부 진짜인 줄 아는 데에서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타인이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는 점이다.
즉, 논픽션 역시 이 세상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스스로에게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임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고, 자기편만 ‘진실’을 보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 이러면 논픽션이 종교와 차이가 없게 된다. !!!
<자기가 고른 세계관은 좀 지키자>
참고로, 나는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 개인적 절대주의자다.
ex: 자신이 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종교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강간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내 알기로, 어린이를 강간하라고 시키는 종교는 없는 것 같다.)
ex2: 만약 수십 명을 살인하고서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연쇄살인마 vs. 신의 이름으로 한 명의 어린이를 강간한 자 중에 누가 더 죽일 놈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후자다.
전자는 거주 국가에 따라 사형당하든 감옥살이를 하든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후자는 (역시 거주 국가에 따라) 형조차 안 살 수도 있다!!!!!! 벌금도 안 물 수도 있다!!!!!
이게 빡이 치는 거다. The crime of bullshittery니까. 한마디로 개소리와 개수작의 죄악.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이란 서로 다른 논픽션 관점을 픽션이나 다름없이 갖고 있음’을 주장한다고 해서, ‘말 따로 행동 따로여도 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것조차 하지 않는 건 경멸스럽다.
그래서 착한 척은 필패한다.
그리고 각자의 세계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발 좀 굳이 같이 할 필요가 없는 걸 그만 좀 같이 해야 한다고 본다. 닭장에 닭을 넣어도 닭이 싫어하는데, 왜 인간을 닭장에 넣어서 뭐가 해결될 거라 보는가?
관심보다 무관심이 더 건강하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공통된 세계관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런데도 공통 세계관, ‘절대 현실’을 만들려다가 지금과 같은 세상이 되어 가고 있는 거다. 각자 다른 버전의 현실에서 살면 될 것을…
<픽션의 논픽션화>
아무튼, 이 모든 와중에, 마치 실험실의 모델처럼 안전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가능해야 할 픽션은 논픽션 취급을 받는다. 미칠 노릇이다. 별별 정치적 이즘을 가져와서는 ‘그런 픽션 쓰지 말라’고 한다.
노예제도가 등장하는 책의 출판이 취소되는 것도 봤고, 트랜스 사람들을 무시한다던 글을 쓴 작가가 트랜스 여성인 경우도 봤다. 그러데도 멈추질 않는다. 픽션을 마치 수치처럼 읽는다. 중력 이론에 버금가는 대단한 진리가 동반된 픽션이 아니면 읽지 않는다. ‘현실 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고 믿어서다.
돌 것 같다.
<결국, 픽션>
픽션은 픽션이다.
논픽션도 아주 근본적인 진리가 아닌 한 픽션이다.
역사 자체가 원래 픽션이다. 그래서 역사는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달리 쓰인다. 사실 요소들이 있기야 하겠지만 (ex: 몇 날 몇 일 이 장소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뭘 두드러지게 보여주느냐 자체가 픽션이란 얘기다.
‘오늘’이란 살기만 하면 절대적 진짜가 된다고 믿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오늘’이란 미래에 그것을 되돌아볼 때 어떤 스토리텔링을 하느냐에 따라 ‘진짜’가 갈리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게 하루의 끝에 쓰는 일기를 통해서일 수도 있고, 수십 년 후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넋두리를 하는 과정에서 미화되거나 희석되는 기억 조각일 수도 있는데, 이러나저러나 ‘지금 내가 여기’ 있다고 해서 그게 절대불변의 ‘진짜’가 되진 않는다.
그래서 존재가 무섭고 명상이 어려운 거다. 명상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숨만 쉬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하여간에 그게 제일 어렵다.
왜냐? 인간은 스토리텔링을 하지 않고서는 존재가 어려우니까. 어마어마한 훈련을 해야지만 앞뒤도 없고 밑도 끝도 없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 훈련에는 논픽션이 진짜라고 믿는 것보다 픽션이 (따라서 엄밀히는 픽션인 논픽션도) 가짜일 수 있되 진실을 담을 수도 있고, 변할 수 있지만 어느 한순간에는 가장 깊은 진리만큼 내게 영향이 있을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라고 본다.
굳이 이득을 따지자면 그렇단 얘기다.
<실용주의의 무용성과 무용주의의 실용성>
나는 실용주의자인데, 무용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만약 무언가가 정말 무용하다면 그건 정말… 상상이 안 간다.
무용하기는 진짜 어렵다. 그냥 사용하는 법을 모르는 자에게 무용해 보이는 거지, 사용할 줄 알면 웬만해선 다 유용하다. 물론 여기에도 ‘자신의 세계관’이 적용되기에, 각자 알아서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걸 취하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어마어마하게 유용한 픽션 같은 걸 세계적 트렌드로다가 무용하다고 하는 것 같으니까 혼란스러운 것…
<마무리>
역사책에서 이래라저래라 가르친다고 해서 그게 절대 불변의 ‘진짜’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무섭다.
뉴스,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수치가 동반된 스토리텔링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그 수치뿐만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진짜’라고 우겨대는 것도 무섭다. (ex: 팔로워, 팔로잉.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으면 물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니, 그냥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는데, 여름에 물놀이도 많이 하니까 자칫하다간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물에 빠져 죽는다’가 결론이 되는 것. 하…)
그러면서 픽션은 ‘가짜’라서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하니까 더 무섭다.
뭐가 픽션이고 뭐가 논픽션인데.
옳고 그름조차 큰 틀에서의 유행이다. 옳고 그름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지 않은 적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국가의 이름으로 수백 명을 사살하면 전쟁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이 수백 명을 죽이고 다니면 그냥 연쇄살인마다.
그런 거다. 그래서 연쇄살인마 중에는 자기가 국가를 위해 그랬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한테는 그게 진짜인 거다. 그게 그저 자기 세계관일 뿐이란 걸 모른다. 그 사람은 뉴스에서 갖가지 세상만사 문제들을 봤기에, 그것들이 진짜가 아닐 리 없으며, 당최가 다른 사람들은 왜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냥 ‘왜 우리는 세계관이 다른가’ 정도의 의문이 아니란 말이다. 자기가 ‘절대 진리’를 퍼뜨린다고 여기는 거다. 즉, 종교다.
아네르스 브레이비크가 그런 류였다. 나는 정말이지, 그 사람이 픽션을 좀 읽고, 없는 걸 있게끔 상상해본 적이 좀 더 많았더라면, 그런 짓을 안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체 얼마나 상상력이 부족하면 연쇄 테러범이 되느냔 말이다. 그거밖에는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게 어이가 없는 거다. 픽션의 가장 좋은 점은, 이야기가 천만 개 이상임이 확실하다는 거다. 그것들이 다 ‘절대 진리’가 아닌, 그냥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급결론은: 픽션을 읽어야 한다.
(이왕이면 눈에 안 보이는 픽션이 현실에서의 ‘진짜’를 선택하는 훈련을 하는 데에는 더 좋다.)
✨ 한아임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 최신 이야기들은 위에도 있습니다. (커버 클릭!) 번역물도 있고 오리지널도 있어요. 📻 아임 드리밍 (팟캐스트) 지름길. 🍊 그밖에, 고막사람도. 👁🗨 또 그밖에! 모던 그로테스크 타임스도.
BTC 형태의 애정은 여기로: bc1qcna5ufd8gdxm6zkll8nxmskp0cx2nsw6lrzm5u
혹은 커피 한 잔 사주세요.